선조 가계도, 임진왜란 붕당정치 한국사 공부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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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조선 왕조 가계도

선조 가계도, 임진왜란 붕당정치 한국사 공부 하기

by 전짜장 202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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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의 14대왕 선조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조 가계도에서 선조는 8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자녀는 14남 11녀의 많은 자식을 낳았습니다.

 

 

의인왕후 박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의인왕후 박씨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번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55년에 태어나서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였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1600년 향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목릉이고, 선조와 함께 묻혀있다고 합니다.

인목왕후 김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는 영창대군과 정명공주가 있었습니다.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에 태어났으며, 의인왕후 박씨가 죽고나서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게 됩니다. 

공빈 김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는 임해군과 광해군(제15대왕) 이 있었습니다.

인빈 김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는 의안군, 신성군, 원종, 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가 있었습니다

순빈 김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순빈김씨 사이에서는 순화군이 있었습니다.

정빈 민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정빈 민씨 사이에서는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가 있었습니다.

정빈 홍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정빈 홍씨 사이에서는 경창군과 정정옹주가 있었습니다.

온빈 한씨

선조 가계도에서 순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는 흥안군, 경평군, 영성군, 정화옹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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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게 되고 제13대 명종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바른 정치를 피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명종에게는 순회 세자가 있었지만, 13세의 어린나이에 죽게되고 명종은 이후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왕손들 가운데서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명종은 죽기 전 이복동생인 덕흥군의 아들을 유심히 지켜보았으며, 그 중 하성군(선조)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는 조선시대의 왕 가운데 고종과 함께 가장 무능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 사건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며, 이후 조선사회는 무너져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에 와서 선조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기에는 반론이 약하다고 합니다.

 

 

 

붕당 정치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 조정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는데요, 조광조를 비롯하여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이른바 기묘사화 이후에 물러나 있었던 인물들이 정계에 복직하기 시작합니다. 붕당은 서로 한문적 생각이나 정치적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무리를 뜻하는데, 이때는 '이조 전랑' 이라는 벼슬때문에 시작하게 됩니다. 높은 관직은 아니였으나, 관리들을 추천하고 뽑게 되는 인사권을 가진 직책이라, 큰 힘을 가지고 있었던 직책이라 합니다.

 

이때 이조 전랑으로 김효원이라는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명종 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이였던 심의겸이 한때 훈구파였던 사람이라며 반대를 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게 되는데요,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에 있어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각각 동인과 서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때 동인은 주로 이황고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았던 경상도의 출신이 많았으며, 서인에서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던 충청도와 경기도의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황은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였고, 이이는 현실적인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이였습니다.

 

초기에는 동인과 서인은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며 바른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점차 권력을 잡기위해 나라의 일은 뒷전이였다고 합니다. 이이는 붕당을 막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했지만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노력도 끝이나게 됩니다. 

 

 

임진왜란

1592년은 아이러니하게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는데, 이때까지 조선은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랜 평화는 국방체계를 무너뜨렸으며, 국력에 기울였어야 할 에너지는 동서분당 등 각 정권 다툼으로 낭비되고 있었습니다. 16세기 후반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서 일본을 통일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표명하였고,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되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수도까지 올라오고 있었으며, 선조는 류성룡을 도제찰사로 삼고 그의 천거로 신립을 도수변사로 삼았습니다. 신립은 배수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구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지만 중과부적 이였따고 합니다. 4월 29일 신립의 패보를 접한 선조는 피난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 일로 신립 또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린 왕

 

왜군이 충청북도에 위치한 충주를 점령하자 선조는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임금이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는데 선조 혼자 급히 피난을 떠나자 백성들은 어버이가 자기만 살자고 자식들을 내팽개 쳤다며 분노하게 되죠.

선조는 피난을 가기전에 자신에게 일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서 광해군을 세자로 삼게 되고, 함경도로 보내서 백성들을 이끌게 하였습니다. 왜군이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함경도 지방까지 공격해오자 선조는 의주로 떠나게 되었고, 명예 도움도 요청하게 됩니다. 왕이 도망간 경북궁에는 노비들이 몰려갔으며, 노비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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