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가계도 조선 16대왕 삼전도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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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조선 왕조 가계도

인조 가계도 조선 16대왕 삼전도의 굴욕

by 전짜장 2022.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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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 제16대왕 인조 가계도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조 가계도에서 인조는 부인이 5명 있었으며, 자녀는 6남 1녀가 있었습니다. 인조의 왕비로는 인렬왕후 한씨, 장렬왕후 조씨, 귀인 조씨, 귀인 장씨, 숙의 나씨가 있었으며 인조 가계도에서 인조 자식으로는 인렬왕후 한씨에게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이 있었으며, 장렬왕후 조씨에게서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인조와 귀인조씨 사이에서는 숭선군, 낙선군, 효명공주가 있었으며, 귀인장씨와 숙의나씨에게서는 인조의 자식은 없었습니다.

 

인조

인조는 선조의 손자로써 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왕이죠. 그래서 광해군의 다음인 조선의 16대왕이 되게 됩니다. 조선시대 역사상 성공했던 반정은 연산군을 몰아냈던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몰아냈던 인조반정이 있습니다. 인조반정에서는 인조가 직접 반정의 세력을 이끌고 연산군을 폐위 시켰습니다. 이후 현재도 많은 연사학자들이 인조반정의 경우에는 일어났으면 안됐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명분도 약했으며, 반정 이후의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에 휩싸이게 되며, 이 원인은 반정세력이였던 인조와 서인 세력이였다고 합니다.

 

인조는 이렇게 세자 생활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되게 되는데, 부왕이 정치를 본적도, 도와준적이 없는 인조로써는 서인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다 보니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서인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광해가 추진해왔던 정책들을 뒤집게 되는데요, 외교 부분도 마찬가지 였다고 합니다. 광해는 명나라가 쇠하고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정세를 읽고 이에 맞는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인조는 이를 단번에 뒤집게 되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계속 섬기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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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삼전도 굴욕

 

국제 정세를 무시한 맹목적 친명사대주의는 큰 화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청나라인 후금의 조선 침략이 이루어지게 되며 첫번째 침략은 정묘호란, 두번째 침략은 병자호란으로 침략을 당했습니다. 두번 모두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고 하며, 당시 북쪽을 지키는 조선 정규군 대부분은 이괄의 난으로 괴멸되었던 상태였습니다. 이괄은 인조와 같이 반정을 일으켰지만, 농공행상에 불만을 가지게 되고, 아들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추궁도 당하게 되자 자신의 병력 모두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며, 북쪽을 지키는 핵심 병력 대부분을 잃게되어 병자호란을 막아 낼 병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의 왕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의식을 치루게 됩니다. 이는 삼배구고두라는 역사에서 손꼽히는 치욕적인 장면인데, 이 장소는 송파구 삼전동 근처의 나루였기 때문에 '삼전도 굴욕' 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소현세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항복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백성중에는 '공녀'라는 이름으로 청나라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소현세자는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지만, 청나라에 잘 적응하게 되는데요, 황실의 행사에 참여하며 청나라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청나라와 조선의 소통 창구 역할도 잘 수행해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 들어온 유럽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국제적인 식견까지 갖추었다고 하며, 함게 끌려온 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백성들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타국에서도 이렇게 잘 해내서 그럴까요, 인조의 질투가 시작되게 됩니다.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9년의 세월을 남의 나라에 붙잡혀 살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에게 상은 커녕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문의 독살을 당하게 됩니다.

 

인조가 살인을 교사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세손이 있음에도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점, 며느리였던 세자빈 강씨를 죽였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낸점은 간접적으로 감정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였습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같이 생활을 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데,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효종입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효종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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