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가계도 대동법,동의보감 및 업적, 조선 15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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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조선 왕조 가계도

광해군 가계도 대동법,동의보감 및 업적, 조선 15대왕

by 전짜장 2022.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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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15대왕인 광해군에 대해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에게는 10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자녀로는 1남 1녀가 있었습니다. 부인으로는 문선군부인 유씨, 숙의 윤씨, 숙의 허씨, 숙의 홍씨, 숙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임씨, 소용 정씨, 숙원 신씨, 조씨가 있었으며 자녀로는 질(폐세자) 그리고 한명에 대해서는 나와 있는게 없습니다.

 

 

 

광해군

 

조선 제15대왕 광해군의 재위기간은 1608~1623년 이였으며, 광해군이 세자 시절이였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되었고, 아버지였던 선조는 멀리 도망글 가게 되었죠. 선조는 그동안에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 이유는 본인의 아버지가 정통성이 없는 것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자식 또한 후궁의 자식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피난 가기 전 세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하였습니다.

 

이로써 광해군은 아버지인 선조가 버리고 간 조선에 남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안정시켰고,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복귀한 선조는 백성들의 지지와 신망을 받고 있었떤 광해군을 질투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의인왕후가 죽고 새로운 왕비인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게 됩니다. 영창대군은 정통성이 있는 아들이였고, 선조는 광해군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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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업적

 

광해군이 조선의 15대왕으로 있던 당시 당파는 서인과 남인 북인 중에서도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광해군으 즉위한 뒤 소북의 중심들은 처형되었으며, 대북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국가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궁궐을 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병으로 지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 (1610)을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으며, 외교도 잘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덕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궁궐 조성에도 힘을 썼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변하였는데 200년넘게 이어왔던 명나라 또한 흔들리고 있었고, 여진족이 힘을 키워 건국한 후금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즉위 하였을 당시에 명나라와 후금이 대립 중이였는데, 후금은 조선에게 외교 관계를 맺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하였으며,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중이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했다 합니다.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응하게 하였으며, 명나라가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 후금에 투항하여 누르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본과는 기유악조를 체결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회답겸쇄환사로 오윤겸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었던 조선인을 쇄한하였습니다.

 

의리를 중시하였던 서인 세력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반대파 신하들의 불만이 쌓여가자 광해군은 왕권의 불만을 가지거나 위협이 되는 인물은 누구든지 죽였다고 합니다.

 

 

폭군 광해군

 

광해군은 자신을 비방하고 다녔던 형인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게 하여 죽게 하였으며, 눈에 가시였던 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유배를 보낸 후 방안에 가둬진 채 장작불에 타 죽게 하였습니다. 역모를 핑계로 배다른 동생을 제거한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가만히 둘리 없었겠죠. 유교 국가에서 왕이 자신의 모친을 폐위시키게 되며 결국 반정군에 의해 축출되게 되는데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모친을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 는 여기서 나왔던 용어로 현재도 역사책에 남아있는 사건입니다.

 

이로 백성들의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으며, 반대파였던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서인들과 인조는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상 두번째 반정이였던 인조반정 입니다.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귀양살이를 18년이나 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모두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고 합니다. 폐세자가 된 광해군의 아들은 유배지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되고, 그 이듬해 폐위된 중전도 세상을 뜨게되어 유배지는 제주도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홀로 제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복위를 꿈꾸었다고 전해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1641년)

 

광해군의 묘는 광해군지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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