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가계도 쉽게 보며 역사 공부 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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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조선 왕조 가계도

정조 가계도 쉽게 보며 역사 공부 해보기

by 전짜장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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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조선의 제 22대왕인 정조 가계도 및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와 더불어서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현재까지도 평가되고 있으며, 이는 드라마로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옷소매 붉은끝동에서 준호가 연기했던 정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게 되었습니다.

 

 

조선 22대왕인 정조는 이름은 이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이며 28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전에 형이였던 의소세손이 요절하며 실질적인 장남이였습니다.

 

1752년(영조28년)에 태어나자마자 바로 왕세손으로 책봉이 되었고, 1762년에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고,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가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고 합니다. 177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고 하는데요, 1776년 영조가 죽고 만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조 가계도

정조에게는 부인이 5명이였으며, 자녀는 2남2녀가 있었는데 부인으로는 효의왕후 김씨, 의빈 성씨, 수빈 박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가 있었습니다.

 

정조 가계도에서 효의왕후 김씨는 정조의 정비로 정조보다는 1살이 어렸습니다. 신라왕손의 후예인 명문가 집안의 출신이였으며, 현종비 명성왕후의 친정집안인 청풍 김씨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여 세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776년 왕비가 되었습니다. 슬하에 소생이 없어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으며,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였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정조 가계도에서 첫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는 정조보다 14살이 어렸으며 후궁으로 간택된지 1년만에 13살에 요절 되었다고 합니다. 

 

정조 가계도에서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에게서도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정조 가계도 세번째 후궁으로는 의빈 성씨가 있는데,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차례나 거절하는 등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였다고 합니다.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으나 둘다 일찍 죽게 되었으며, 뒤이어 임싱중이였던 의빈 성씨는 원인모를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정조 가계도에서 대를 이었던 순조의 어머니였던 네번째 후궁 수빈 박씨

정조보다 18살이 어린 네번째 후궁이였으며, 16세때 후궁으로 선발 되었다고 합니다. 후궁으로 간택되고 나서 꽤 오랜기간 아들을 갖지 못하였는데 그 사이 효의왕후가 임신을 하여 애매한 위치가 될 뻔 하였으나, 효의왕후의 임신이 상상임신임이 밝혀진 후 9개월 후에 순조를 낳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빈 박씨는 평소에도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발랐으며, 검소하게 지냈던 성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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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업적

 

정조의 첫번째 업적으로는 척살이 있겠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때 당시 처음으로 했던 일인데, 영저의 나이가 들면서 병세가 악회되어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대리청정을 반대했었던 홍인한과 정후겸과 같은 척신들은 왕이 된 후 바로 척살을 진행 하였으며, 홍인한이 사약을 받을 당시 풍산 홍 씨들이 모반을 꾀하였으며, 암살도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인해 풍산 홍 씨는 모조리 피를 봤었으며,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아서 시작부터 불안정 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두번째 업적으로는 탕평책이 있습니다. 탕평책은 영조 때 처음으로 등장했던 정책인데 정조가 그 뒤를 받아서 추진하게 됩니다.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보다 더욱 훌륭했던 탕평책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는 자신의 의리에 참여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을 지향했습니다. 자신의 의리에 의해 참여하기만 한다면 남인이든 소론 강경파든 여러 당파를 등용하였으며, 이는 차별없이 이루어졌기에 준론 탕편 이라고도 불립니다.

 

 

 

수원 화성 건립

정조는 한양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분산하였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 싶어했는데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수원 화성 건립이였습니다. 한양에서는 하지 못할 정책들을 이 곳에서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한양에서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었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규장각 설치

정조는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게 위해 많은 인재를 필요로 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게 바로 규장각 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왕립 도서관이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인재들을 육성하는 공간이였다고 합니다.

규장각과 연계하여 실시했던 제도가 초계문신제도인데, 이는 37세 미만 나이가 어린 관료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신분과 상관없이 발탁하는 제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로 우리가 다 아는 정양용이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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