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가계도 :: 흥선대원군 아들, 명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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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상식/조선 왕조 가계도

고종 가계도 :: 흥선대원군 아들, 명성왕후

by 전짜장 2022.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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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의 제26대왕 고종 가계도에 대해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종의 초휘는 재황, 아명은 명복, 초자는 명부, 자 성림, 호 주연,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입니다. 고종은 즉위 전까지는 철종과 법적으로 9촌이였으며, 실제 혈통으로는 무려 17촌이였습니다.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효종 후손들로 이어졌던 왕실 직계와는 먼 방계였으나, 할아버지인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이였던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가까운 왕실의 일원이 되게 되었습니다.

 

 

 

 

고종 가계도
명성황후 민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왕비로는 명성황후 민씨가 있었으며, 아들로는 순종인 대한제국 2대 황제이며, 조선의 제 27대왕이 있습니다.

 

귀빈 엄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는 귀빈 엄씨가 있었으며, 자식으로는 영왕인 이은이 있습니다.

귀빈 이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 귀빈 이씨가 있으며, 자식으로는 완친왕인 이선과 이육이 있습니다.

귀인 장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 장씨가 있으며, 자식으로는 의친왕인 이강이 있었습니다.

소의 이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 소의 이씨가 있었으며, 자식은 없었습니다.

귀인 정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 정씨가 있었으며, 자식으로는 이우가 있었습니다.

귀인 양씨

고종 가계도에서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 양씨가 있었으며, 자식으로는 덕혜옹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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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고종은 10년 동안 이어졌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기 위해서 정치적인 조력자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아내인 명성황후와 함께 하였습니다. 왕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동안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조정을 장악한 채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의 청산과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을 받고 청나라가 개입 하면서 개화파는 '삼일천하' 라는 말을 남기고 축출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청나라와 일본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하여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침략을 엿보던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갑오개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나라가 개입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하여 조선땅에 토벌을 보내며 동학농민군 토벌을 마친 두 나라는 조선의 재배권을 두고 청일전쟁까지 벌이게 되며, 두달동안 한반도와 중국 일대에서 벌어졌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내쫓으며 흥선대원군을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 을미년 러시아의 힘을 빌려 친일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던 명성황후는 결국 일본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단발령 등이 포함된 일본의 급진적인 개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고종은 아들이였던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정치적 재기를 노렸습니다. 다른 나라와 대등한 국가 위상이 필요했던 고종은 제국 선포를 위해 1년만에 환궁하였으며, 광무황제로 등극하여 국호가 대한임을 선포 하였습니다. 표먼적으로는 왕에서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안위는 이전보다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1898년에는 고종이 즐기던 커피에 아편독을 넣은 독차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여러차례 있었으며, 아관파천 이후 조선 침탈의 야욕이 꺾인 일본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탈권을 인정받게 되며, 이후 일본은 본격적인 대한제국 병합에 나섰습니다. 이때 당시 조선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의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의 체결이 이루어졌으며, 을사오적이라고 일컫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다섯 매국노가 앞장을 섰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국권 상실과 질곡 속으로 급격히 빠져들면서 조선의 패망이 현실화가 되었습니다. 이걸 막아보려던 고종은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인해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하게 됩니다.

 

고종은 패망의 순간을 지켜보며 1919년 1월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고종의 죽음은 지금도 독살설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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